어린 시절, 새벽녘 동쪽 하늘에 유독 밝게 빛나는 별 하나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샛별, 금성.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의 이름을 가진 이 행성은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구름에 싸인 그 신비로운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에 열대 우림이 우거지고, 공룡이 뛰어다니는 태고의 낙원이 있을 거라 꿈꿨다.
그러나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 4장 '천국과 지옥'에서 충격적인 진실을 들려준다.
"우리의 아름답고 푸른 행성 지구는 인류가 아는 유일한 삶의 보금자리이다. 금성은 너무 덥고 화성은 너무 춥지만 지구의 기후는 적당하다."
우리가 천국이라 믿었던 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이었다.
깨어진 환상,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
이 발견이 주는 충격은 단순히 과학적 사실의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세이건은 이렇게 말한다.
"불충분한 자료에 근거한 추론은 우리를 쉽게 오류의 늪에 빠지게 한다."
수세기 동안 망원경으로 금성을 관찰한 천문학자들조차 그 두꺼운 구름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상상력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열대 정글, 늪지대, 심지어 바다까지. 인간의 희망과 욕망이 투영된 환상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소련의 베네라 탐사선이 금성 표면에 도달했을 때, 모든 환상은 산산조각 났다.
"(구) 소련 베네라 우주선이 최초로 두꺼운 구름층을 통과해서 표면에 착륙해보니 금성은 타는 듯이 뜨거운 곳이었다. 늪지도, 유전도, 탄산수의 바다도 없었다."
탐사선은 불과 몇 분 만에 그 극한의 환경에 굴복했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전송한 데이터는 인류의 인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지구라는 기적
금성의 지옥 같은 환경을 알게 된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는 지구의 특별함을 깨닫게 된다.
"지구의 현재 기후 여건이 실은 불안정한 평형 상태일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수단들을 동원하여 지구의 연약한 환경을 더욱 교란시키고 있는 중이다."
세이건의 이 말은 마치 우주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너희가 당연하게 여기는 그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맑은 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것인지 아느냐고.
경고의 메시지
앤 드루얀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서 더욱 심오한 통찰을 전한다.
"과학이 자연을 사랑하는 방식이 꼭 그렇다. 최종 목적지, 즉 절대적 진리를 가정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과학이 성스러운 탐색에 걸맞은 방법론이 되어 주는 이유다. 방대한 우주는 — 그리고 그 방대함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는 사랑은 — 교만한 자에게는 자신을 열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수시로 상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만을 온전히 받아 준다."
이렇듯 미리 답을 정하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과학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진짜 금성의 모습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답을 찾아보면 알수 있다. 금성도 한때는 지구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물이 있었고, 온화한 기후가 있었을지도. 그러나 통제를 벗어난 온실효과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바다는 증발했고, 이산화탄소는 대기를 가득 채웠으며, 행성은 영원한 지옥으로 변했다.
이것이 단순히 다른 행성의 이야기일까?
우주적 관점에서 본 우리의 선택
세이건의 시선은 항상 우주에서 지구로, 그리고 다시 우리 인간에게로 향한다. 또한 세이건은 지구는 아주 작고 연약한 세계이다. 지구는 소행성의 충돌, 공전 궤도의 미세한 변화 같은 우주로부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인류의 자기 파멸적인 행동에 고통받고 있다고 했으며, 이 말에는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숭고한 사명감이 담겨 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아름다운 행성에 태어났지만, 이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금성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미래는 경고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기 때문에, 이해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을 넘어서
"혜성은 인류에게 공포감과 함께 경외심을 불러일으켜 왔으며, 마음을 홀리는 망령된 미신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세이건의 이 말처럼, 우주는 항상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선사했다.
금성의 진실은 우리의 환상을 깨뜨렸지만 더 깊은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우주는 우리의 도덕적 범주를 초월한다. 그곳엔 천국도 지옥도 없다. 오직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세계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이 푸른 행성을 계속해서 생명이 피어나는 낙원으로 가꿀 수도 있고, 금성처럼 모든 생명이 질식하는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창백한 푸른 점에서 보내는 편지
우리는 서서히 자연의 책을 읽는 법을,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법을, 나무를 보살피는 법을 익혔다. 우리가 코스모스라는 망망대해에서 언제,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코스모스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수단이, 별로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여전히 금성은 아름답게 빛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 아름다운 빛 뒤에 숨겨진 진실을. 그리고 그 진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인류에게 지구야말로 낙원인 듯하다. 결국 우리는 이곳에서 진화해왔다."
지구는 참으로 연약하며, 소중히 다루어져야 할 존재이다.
영원한 여행자들에게
칼 세이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과학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며,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이고,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다.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이 우주 여행은 결국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었다.
광막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것이 세이건이 우리에게 선물한 가장 아름다운 깨달음이다.
새벽녘 동쪽 하늘에 빛나는 샛별을 다시 올려다본다.
이제는 안다. 저것이 지옥일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저 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제는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푸른 행성을 지켜야 한다고. 이 특별한 천국을 영원히 간직해야 한다고. 그것이 우주를 향해 첫발을 내딛은 우리 인류의 가장 신성한 의무라고.
참고문헌:
- 칼세이건, 『코스모스』(홍승수 번역, 사이언스북스, 2006)
- 앤 드루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김명남 번역, 사이언스북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