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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 고전 소설 속 '악'과 그 의미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다시 보기

by 아너스88 2025. 7. 8.

고전문학이 현대 독자들에게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인간 내면에 잠재한 '악'의 본질을 치밀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1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악이란 무엇이며, 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악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자만에서 시작되는 악의 뿌리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통해 그려낸 악의 근원은 단순한 범죄나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자만'이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이지만, 자신을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 그는 인류를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누고,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고 믿는다.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이었다. 그것은 원초적 죄로서 모든 악행과 범죄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러한 자만은 단순한 교만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다. 그는 자신이 신처럼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한다.

작품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핵심이 뭐냐면, 이분의 논문에서는 모든 사람이 어찌어찌하여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분류돼. 평범한 사람은 순종하며 살아야 하고 법률을 뛰어넘을 권리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반면, 비범한 사람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방식으로 법률을 뛰어넘을 권리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비범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이러한 사상은 현대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권력자들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식인들이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모습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죄와 벌》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해체에서 구하는 거지. 하나의 죽음과 백 개의 생명을 서로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논리의 허구성을 치밀하게 폭로한다.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의 본질은 바로 모든 경계와 규범, 그리고 도덕성을 넘어서는 것에 있다. 선한 목적을 위한 악한 수단은 결국 그 목적 자체를 오염시킨다.

실제로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인 후 우발적으로 무고한 리자베타까지 살해하게 되는 장면은 악의 확산성을 보여준다. 한 번의 악은 또 다른 악을 불러오고, 결국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단 저지른 수단으로서의 악은 우리 사회에 이미 새로운 해악으로 자리잡게 된다. 목적으로서의 선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수단인 악에 의해 파생된 나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다.

죄책감과 양심의 목소리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낸 악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그것이 인간의 양심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이론을 실행에 옮긴 후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는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비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현실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죄를 저지른 후 무시무시한 도덕적 고통을 겪는다.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실행한 후 절대적 자유와 홀가분함을 느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바로 자신에게 내재한 인간적 본성, 즉 양심의 가책이었던 것이다.

그래, 나의 행동이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그토록 추악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그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것이 악행이기 때문에? ‘악행’이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나의 양심은 평온하다. 물론, 형사상의 범죄를 저질렀다. 물론, 법조항이 파괴됐고 피를 보았으니, 뭐 그렇다면 법조항에 대한 대가로 내 머리를 가져가시라……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그런 경우라면 권력을 세습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쟁취한 인류의 은인들 대다수가 최초의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처형됐어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그자들은 그 걸음을 견뎌 냈고 그랬기에 그들은 옳았던 반면 나는 견뎌 내지 못했고 그랬기에 나는 스스로에게 그 걸음을 허용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 즉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하고 자수했다는 점에서만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이것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인간은 아무리 이론적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려 해도, 결국 양심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소시오패스'라 불리는 사람들조차도 완전히 양심이 없는 것은 아니며, 어딘가에서는 내적 갈등을 겪는다.

‘정의’와 ‘폭력’, ‘이성’과 ‘양심’의 균형

현대 사회 속 라스콜리니코프들

《죄와 벌》이 150년이 지난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인물들이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대판 라스콜니코프'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너무나도 많다. 그들은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기만 할 뿐 벌을 받지 않는다.

기업의 임원이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라며 불법행위를 저지르거나, 정치인이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부정부패에 손을 대는 모습, 정치인들이 대놓고 거짓을 태연하게 진실인듯 꾸미는 세태에서 우리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SNS에서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타인을 공격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을 도덕적 심판자로 여기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과 닮아있다.

특히 현대 사회의 과도한 경쟁 구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가진 '비범한 인간은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상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구원의 가능성: 소냐가 제시하는 길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절망적인 진단만을 내리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매춘부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날 세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 희생이 원인이면 자기 희생이 해법이다.

소냐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산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된다. 이는 악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사랑과 용서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신념을 보여준다.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만남을 통한 절망과 희망, 구원과 용서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만남을 통한 절망과 희망, 구원과 용서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

《죄와 벌》이 제기하는 악에 대한 문제는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공지능과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재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들과 마주하고 있다. 효율성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해도 되는가? 기술 발전이 인간의 도덕성을 훼손해도 되는가? 더 큰 선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으며, 어떤 목적도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은 자만을 버리고 겸손한 사랑의 길을 걸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죄와 벌》은 여전히 날카로운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라스콜리니코프인가, 아니면 소냐인가? 그리고 진정한 선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