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는 순간, 나는 화성이 아닌 지구에 서 있는 내 자신과 마주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5장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는 겉으로는 화성 탐사의 역사를 다루지만, 실은 우리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세이건은 이 장의 서두에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하필 화성인인가? 토성인이면 어떻고, 명왕성인이라면 뭣이 문제란 말인가? 화성인만 두고 그토록 열렬히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명쾌하게 답한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화성이 지구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화성은 지구에서 그 표면을 관측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행성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극관이나, 하늘에 떠나니는 흰 구름, 맹렬한 흙먼지의 광풍. 계절에 따라 변하는 붉은 지표면의 패턴, 심지어 하루가 24시간인 것까지 지구를 닮았다.
화성이라는 거울
이렇게 닮은 행성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상상했을까? 세이건의 통찰은 여기서 빛난다. 화성이 지구인의 희망과 두려움을 투사할 수 있는 신화의 공간으로 어느새 둔갑해 버린 것이다. 화성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스크린이 되었다.
19세기 말, 퍼시벌 로웰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가 있었다. 그는 화성 표면에서 운하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로웰은 자신이 보고 있는 그물 같은 것이 극관에서 녹아 내린 물을 적도 지방에 사는 목마른 도시민들에게 수송해주는 거대한 용수라고 믿었다. 행성 전역에 걸쳐 관개시설이 되어 있는 이 행성에 지구인과 아주 다른, 그리고 더 오래되고 더 현명한 종족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반복되는 블루스의 선율
지금 우리는 로웰의 운하가 착시였음을 안다. 하지만 그의 상상력이 단순한 오류였을까? 세이건은 이렇게 말한다.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는 여러 차례 반복 연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성에 대한 우리의 환상과 실망,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사이클은 계속 반복된다. 바이킹 탐사선이 화성에 생명체가 없음을 확인했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화성의 과거나 미래에 생명이 있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주적 고독과 연결성
이 집착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답은 칼 세이건이 책 전체에서 강조하는 메시지에 있다.
"우주에는 은하가 대략 1000억개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저마다 평균 1000억개의 별이 있다. 모든 은하계를 다합치면 별의 수는 10의 22제곱만큼이나 된다. "
이토록 광대한 우주에서 생명이 사는 행성을 아주 평범한 별인 우리의 태양만이 거느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세이건은 우리의 특별한 행운을 생각하는 것보다 우주가 생명으로 그득그득 넘쳐 난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화성 생명체를 찾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인지, 아니면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인지를 확인하려는 시도다.
앤 드루얀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서 이를 더욱 시적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별의 물질로 만들어졌고, 나머지 우주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를 이루는 물질은 우주의 불길에서 탄생했다.
이어서 그녀는 말한다.
"그리하여 커다란 나무가, 많은 가지를 길러낸 나무가 자랐다. 하마터면 여섯 번이나 쓰러질 뻔했지만, 여전히 용케 자라고 있다. 우리는 그 나무의 작은 한 가지일 뿐이고, 나무 없이는 우리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서서히 자연의 책을 읽는 법을,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법을, 나무를 보살피는 법을 익혔다. 우리가 코스모스라는 망망대해에서 언제,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코스모스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수단이, 별로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칼 세이건 코스모스의 진정한 매력은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는 철학적 성찰에 있다. 외계 생명체를, 우주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 연결망 속에서 우리를 알기 위한 것으로 또 연결된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홍승수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세이건의 문장에는 그의 뜨거운 열정이 묻어났고 원문에 담긴 인문학적 품격을 살리기 어려워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칼 세이건의 인문학적 지식과 열정을 느끼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부끄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지구에 대한 책임
화성 탐사의 역사는 인간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의 역사다. 1877년 조반니 스키아파렐리가 화성의 '카날리'를 관측했을 때부터, 1976년 바이킹 탐사선이 화성 표면에 착륙했을 때까지, 그리고 현재 퍼서비어런스가 화성을 누비며 고대 생명의 흔적을 찾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붉은 행성에 블루스를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세이건은 우주 탐사가 지구를 소홀히 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블루스의 의미
이 블루스는 단순한 슬픔의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고독하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류의 노래다. 우주 탐사는 밖을 향한 것 같지만, 실은 우리 내면을 탐사하는 여정이다.
신비로운 우주의 과학적 원리들로부터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에 대한 책임 그리고 나와 우리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들까지로 연결되는 것, 이것이 『코스모스』를 읽어나가는 매력이자 묘미다.
감성 독서의 진수
세이건은 화성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붉은 행성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외로움과 호기심,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홍승수 교수는 세이건이 기독교의 비합리성을 이 책에서 맹렬히 공격했으니, 「코스모스」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은 우호적일 수 없다. 그러나 과학계는, SETI 계획을 단순한 소망의 차원에서 과학의 반열로 올려놓은 장본인이 바로 칼 세이건이라고 평가한다고 전한다.
SETI 계획은 '외계 지적 생명체 탐색(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을 의미하는 약자로, 우주에서 외계인의 존재를 찾기 위한 과학 프로젝트이다. SETI 계획은 우주에서 오는 전파를 수신하여 분석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전파 신호를 찾아냄으로써 외계 지적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시도이다.
영원한 울림
코스모스를 읽으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화성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미생물이나 물의 흔적이 아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오히려 지구와 인간의 소중함을 재발견한다.
지구가 우리에게만 의미심장한 곳일지 모르겠지만 어쩌랴 우리의 보금자리요. 우리를 길러준 부모가 지구인 것을... 바로 여기에서 인류는 코스모스 탐험의 열정을 키웠으며 아무런 보장 없이 고통스러운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통해 과학을 시로 만들었다. 차가운 우주의 진실 속에서 따뜻한 인간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는 결국 푸른 행성에 사는 우리를 위한 노래였다.
우주를 탐사하는 것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더 넓은 시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 감성 독서란 이런 것이 아닐까. 과학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우주를 보며 인간을 생각하는 것.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감성 독서의 텍스트다. 특히 5장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는 과학과 문학, 역사와 철학이 어우러진 한 편의 교향곡이다. 화성은 여전히 붉게 빛나며 밤하늘에 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붉은 점을 올려다보며 상상한다. 언젠가 그곳에 발을 디딜 날을, 그곳에서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날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과학책이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책이다.
참고문헌
칼 세이건, 『코스모스』(홍승수 번역, 사이언스북스, 2006)
앤 드루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김명남 번역, 사이언스북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