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한 문장 훅
- 시간을 건너 작품 앞에 선다는 것
- 고대 예술이 건네는 느린 호흡: 석상과 그림 사이
- 예술 감상법의 핵심: 눈으로 맛보고 마음으로 교감한다는 뜻
- 한 경비원의 10년, 한 관람자의 10분, 그리고 ‘영원한 순간’
- 사례로 읽는 시간의 층위들
- 데이터가 말해주는 시간의 축적
- 남겨두는 몇 문장: 패트릭 브링리에게서 배운 것
- 마무리: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자리
1. 한 문장 훅
- 왜 어떤 작품은 수백 년을 건너도 지금 내 눈앞에서 막 시작된 말처럼 들려오는가.
- 그 앞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과거의 속삭임일까, 아니면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현재의 목소리일까.
2. 시간을 건너 작품 앞에 선다는 것
미술관의 작품들은 오래 버틴다. 때로는 수백 년, 멀게는 수천 년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흘러들어온다. 관람자는 그 흐름 위에 잠시 올라선다. 패트릭 브링리는 바로 그 흐름의 중간 지점,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좁고 긴 다리 위에서 10년을 보낸 사람이다. 그가 미술관 경비원으로 들어선 까닭은 삶의 심연과 맞닿아 있다.
“나의 결혼식이 열렸어야 했던 날, 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화려한 커리어를 뒤로한 채, 작품들 사이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선택한다.
“그렇게 한동안은 고요하게 서 있고 싶었다.”
이 두 문장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그의 개인사로 압축한다. 상실의 시간, 멈춤의 시간, 그리고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회복의 시간이 순서대로 이어진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고리처럼 겹친다. 관람객의 발걸음, 방범선의 특정 구역 근무, 전시의 교체 주기, 그리고 계절과 낮밤의 리듬이 서로를 비춘다. 그 리듬이 축적될수록 작품은 더 오래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린다.
3. 고대 예술이 건네는 느린 호흡 : 석상과 그림 사이
‘고대 예술’은 시간의 체감 장치가 된다. 이집트의 사자 머리 여신 세크메트 조각 앞에 서면, 기원전 14세기경의 석질과 눈매가 지금의 공기를 가른다. 이 조각군은 아메노테프 3세 시대에만 수백 점이 제작되었고, 잔존이 확인되는 것만도 대략 600점에 이른다. 표기된 한 점은 뉴욕 5번가 메트의 갤러리 131에 전시 중이다.
이처럼 ‘질료의 시간’이 주는 위압과 달리, 아주 작은 패널 회화가 만들어내는 ‘심리의 시간’도 있다. 두초(Duccio)의 「성모자(Madonna and Child)」는 손바닥보다 약간 큰 나무 패널에 템페라와 금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화면의 가장자리에 난 낮은 난간(파라핏)이 관람자의 세계와 성스러운 장면을 동시에 잇고 가른다. 이 얇디얇은 경계는 ‘영원’과 ‘지금’을 맞닿게 하는 시각적 장치다. 작품은 1300년경으로 비정되며, 메트는 이 패널을 2004년 대규모 취득으로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석상의 무게와 패널의 얇음, 하나는 물질로 오래 버티고 다른 하나는 시선의 장치로 시간을 접는다. 이렇게 서로 다른 미학이 ‘영원한 순간’을 만든다. 즉 오래됨의 체감은 크기에서 오지 않는다. 시간의 두께는 형상과 구조가 만든다.
4. 예술 감상법의 핵심 : 눈으로 맛보고 마음으로 교감한다는 뜻
브링리가 보여준 감상법의 핵심은 기술적 지식을 쌓는 것보다 먼저 ‘느리게 머무는 태도’에 있다. 그는 작품의 앞에서 서성이고, 무릎을 굽혔다가 한 발짝 물러서고, 다른 조명의 시간대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낸다. 작품은 설명 이전에 ‘접촉’된다. 눈으로 맛본다는 말은 빛과 거리, 각도의 변주를 허락한다는 뜻이고, 마음으로 교감한다는 말은 그 변주를 자신의 서사에 연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늘 현재형으로 돌아온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가 ‘아주 오래전의 어떤 손’과 만나는 방식으로.
5. 한 경비원의 10년, 한 관람자의 10분, 그리고 ‘영원한 순간’
경비원의 시간은 길고, 관람자의 시간은 짧다. 그런데 이 길이의 차이가 반드시 밀도 차이를 뜻하지는 않는다. 어떤 관람자는 10분 안에 작품의 심부를 건드리고, 어떤 경비원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한 작품의 숨길을 이해한다. 브링리의 책이 설득력을 갖는 지점은 이 둘이 우열이 아니라 ‘겹침’으로 만난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다. 그는 관람객의 몸짓에서 작은 단서를 읽고, 작품의 균열에서 오래된 손끝의 습관을 더듬는다. 그때 시간은 느리게도, 갑자기도 흐른다.
6. 사례로 읽는 시간의 층위들
1) 세크메트 조각 앞에서: 돌의 밤과 낮
세크메트의 사자 머리는 밤빛을 더 좋아한다. 조명이 낮아지면 턱선이 짧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광택의 미세한 흔들림이 털의 결을 만든다. ‘전쟁과 역병의 여신’이라는 이름은 시간의 가혹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치유의 기원과 제의의 반복을 환기한다. 같은 형상 수백 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복의 시간’을 증언한다. 그 반복은 개인의 비극보다 길고 문명의 운보다 끈질기다.
2) 두초의 패널 앞에서: 경계선의 현재형
두초의 난간은 얇지만 확실한 경계다. 경계는 시간을 나눈다. ‘성스러움의 무시간’과 ‘관람자의 시공간’을 동시에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우리는 ‘영원한 현재’를 체험한다. 그래서 작은 그림이 거대한 충격을 만든다. 메트가 이 패널을 ‘유럽 회화사의 이정표’로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는다.
3) 전시실 경비 동선이라는 시간 장치
브링리는 하루 여덟 시간 이상을 전시실에서 보낸다. 같은 자리를 지킬 때, 사람의 시각은 일종의 ‘심화’ 과정을 겪는다. 처음엔 보지 못하던 미세한 균열, 금박의 들뜸, 바니시의 가벼운 깊이를 보기 시작한다. 관람객의 흐름도 파도처럼 읽힌다. 점심시간 전후의 템포, 주말의 소음, 비 오는 날의 낮은 톤. 경비 동선은 단지 노동의 길이 아니라 ‘작품-공간-사람’이 얽히는 시간 기계다. 그의 문장은 이 기계가 어떻게 상실을 다루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7. 데이터가 말해주는 시간의 축적
미술관의 시간은 통계로도 읽힌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2025 회계연도 방문객은 570만 명을 넘어섰다. 팬데믹 이후 회복의 곡선이 이어졌고, 특정 전시의 개막일에는 8년 만의 최고 일일 관람을 기록했다. 2017~2019년 전성기의 연간 700만 명대와 비교하면 여전히 오르내림이 있지만, 그 자체로 ‘도시-기관-대중’이 함께 만드는 시간의 파동을 보여준다.
작품은 오래 버티고, 관람은 계절을 탄다. 데이터는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축적과 회복, 그리고 우연한 폭발을 반복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주석이 된다. 이 숫자들은 브링리의 내밀한 서사와는 다른 언어지만, 같은 장면을 가리킨다. ‘영원’은 통계 그래프 위에도 잠깐씩 떠오른다.
8. 남겨두는 몇 문장 : 패트릭 브링리에게서 배운 것
그의 글에는 일상과 영원의 경계에 서서 건네는 말들이 있다. 그중 한 문장은 오래 머문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문장은 ‘감정의 연속성’을 가장 간결하게 말한다. 상실 이후의 삶은 ‘극복’이라기보다 ‘동반’에 가깝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감정으로 이어진다. 그는 작품 앞에서 그 연속성을 배운다. 슬픔은 곧바로 위로가 되지 않지만, 위로는 언젠가 슬픔의 문장과 같은 문단에 놓인다.
또 하나, 그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순간’을 여러 번 기록한다. 작품은 반드시 언어로 번역되지 않아도 된다. 느리게 서서, 눈으로 맛보고, 마음으로 맞물릴 때, 비로소 ‘과거와 현재’가 충돌 없이 포개진다. 그때 관람자는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시간을 만든다.
9. 마무리 :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자리
책의 12번째 주제인 ‘예술과 시간의 흐름’은 사실 그의 10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고대 예술은 느림의 기술을 가르치고, 한 편의 작은 패널은 현재형의 영원을 예비한다. 미술관은 그래서 시간이 모여 사는 장소가 된다.
브링리는 형의 죽음이라는 깊은 밤을 지나, 작품들 사이에서 새벽을 배운다. 그가 지킨 전시실은 ‘과거의 숨’과 ‘현재의 맥박’이 교차하는 작은 비탈길이었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각자의 시간을 고쳐 묶는다. 오래된 조각의 표면과 작은 패널의 금빛, 여신의 눈매와 성모의 서늘한 슬픔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알게 된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감정은 이어진다는 것. 그래서 어떤 순간은, 정말로 영원해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