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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세상을 지배한다 - 유발하라리, 『넥서스』

by 아너스88 2025. 10. 4.

목차

  1. 우리는 정말 개별적 존재인가?
  2. 정보의 진짜 얼굴: 연결하는 힘
  3. 이야기가 만든 거대한 질서
  4. 권력이 된 네트워크의 그림자
  5. AI 시대, 새로운 연결의 딜레마
  6. 연결 속에서 찾는 우리의 자리

 

"당신이 지금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라면?"
"우리가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 갇혀 있다."

1. 우리는 정말 개별적 존재인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SNS를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하며, 온라인 쇼핑으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한다. 이런 일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독립적인 개인'일까? 유발하라리의 신작 『넥서스』(김명주 번역, 김영사)는 이런 당연한 듯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인간 존재 자체가 '연결'의 산물임을 파헤친다.

하라리는 이번 책에서 전작 『사피엔스』, 『호모데우스』에서 다뤘던 인류사를 정보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렌즈로 재해석한다.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인간이 만들어온 모든 문명이 사실은 정보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엮어내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들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였다면?

"요컨대, 정보는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고 재현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는 항상 연결한다. 이것이 정보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 유발하라리, 『넥서스』

이 인용문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통찰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보의 역할 - 진실을 전달하고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 - 은 사실 부차적이라는 뜻이다. 정보의 진짜 힘은 연결에 있다. 사람과 사람을, 집단과 집단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그 연결 자체가 문명을 만들어왔다.

지구 위에 빛의 거미줄처럼 얽힌 연결망을 시각화

2. 정보의 진짜 얼굴 : 연결하는 힘

정보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이해는 대부분 잘못되었다. 뉴스는 사실을 전한다고 믿고, 교육은 지식을 전수한다고 생각하며, 소셜미디어는 소통의 도구라고 여긴다. 하지만 하라리가 제시하는 정보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의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보들을 떠올려보자. 종교, 국가, 화폐, 법률 - 이것들이 진실인가? 객관적 현실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모두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이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거대한 협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기독교라는 이야기가 유럽을 하나로 엮었고, 민족주의라는 이야기가 근대 국가들을 탄생시켰으며, 자본주의라는 이야기가 글로벌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정보의 주된 임무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을 연결하는 것이고, 그 동안의 역사에서 정보 네트워크는 대체로 진실보다 질서를 우선시했다." - 유발하라리, 『넥서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정보가 권력이 되는 순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실 여부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질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가 정보의 힘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가짜뉴스가 진짜 뉴스보다 빠르게 퍼지는 이유도, SNS에서 극단적 의견들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결의 양면성: 협력과 조작

물론 연결 자체는 중립적이다. 같은 정보네트워크가 때로는 놀라운 협력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끔찍한 조작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인터넷이 전 세계 과학자들의 협력을 가능하게 만들어 COVID-19 백신을 1년 만에 개발하게 했지만, 동시에 음모론과 가짜정보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같은 기술, 같은 네트워크가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하라리는 이런 딜레마를 '넥서스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연결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힘은 커지지만, 동시에 조작당할 위험도 커진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이 전 세계 30억 명을 연결해주지만, 동시에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작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권력을 갖게 된 것처럼 말이다.

3. 이야기가 만든 거대한 질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하라리는 그것이 바로 '이야기를 믿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침팬지도 학습하고, 코끼리도 감정을 표현하며, 돌고래도 복잡한 사회구조를 만든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수백만 명이 함께 믿을 수 있다.

돈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지폐는 그냥 종이다. 동전은 그냥 금속 조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돈의 이야기'를 믿기 때문에, 이 종이 조각으로 집을 사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라는 '이야기'를 5천만 명이 함께 믿기 때문에, 우리는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며 국방의 의무를 진다.

"네트워크는 정보들을 연결해서 거대한 '질서'를 만든다." - 유발하라리, 『넥서스』

이 짧은 문장 속에 인류 문명의 비밀이 숨어 있다. 개별적인 정보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될 때, 단순한 합 이상의 무언가가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질서'다. 종교적 질서, 정치적 질서, 경제적 질서 -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정보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된 결과물이다.

질서의 이면: 누가 연결을 통제하는가?

그런데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누가 이런 연결을 통제하는가? 누가 어떤 정보를 어떻게 연결할지를 결정하는가? 하라리는 이 지점에서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정보네트워크의 구조를 설계하고 통제하는 자가 실질적으로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정보의 중심이었다. 누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결정하는 권력을 가졌다. 근대에는 국가가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며 국민들의 연결 방식을 좌우했다. 그리고 지금은?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누구와 연결되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를 알고리즘으로 결정한다.

저자의 통찰: 하라리는 이 책을 쓰면서 자신조차 이런 정보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의 이전 저서들이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 역시, 출판사-언론-독서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거대한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4. 권력이 된 네트워크의 그림자

정보네트워크가 권력이 될 때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독재자들은 군대와 경찰로 사람들을 직접 통제했다. 하지만 현대의 권력은 훨씬 더 교묘하다. 사람들이 스스로 원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취향에 맞는 영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취향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 더 자극적이고, 더 극단적이며, 더 오래 머물게 만드는 콘텐츠로 말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더 분극화되고, 점점 더 확증편향에 빠지게 된다.

하라리는 이런 현상을 '네트워크 독재'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독재처럼 명령과 강제가 아니라, 연결과 유도를 통한 지배다.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 연결된 개인들의 역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정보네트워크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정보가 연결을 위해 진실을 희생한다면?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하고만 연결된다면?

브렉시트 투표, 트럼프의 당선, 각종 포퓰리즘의 확산이 모든 현상들 뒤에는 정보네트워크의 왜곡이 있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에 노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더 편향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연결이 깊어질수록 분열도 깊어지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라리는 이를 '연결된 고립'이라고 표현한다. 기술적으로는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는 의미다. 페이스북 친구가 수백 명이어도, 실제로는 모두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정보를 가진 자가 권력을 쥔 순간

5. AI 시대, 새로운 연결의 딜레마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이 AI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ChatGPT, GPT-4, 그리고 수많은 AI 시스템들이 우리의 일상에 들어오면서, 정보네트워크의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인간끼리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AI가 함께 연결되는 혼종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이런 변화가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AI가 인간의 편견과 한계를 보완해서 더 합리적인 정보네트워크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인간의 조작을 더욱 정교하고 강력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하라리는 이런 불확실성 앞에서 섣부른 낙관도, 맹목적 비관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성의 재정의: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될 것인가?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고 싶은가?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인가? 효율성인가, 진실인가, 자유인가, 안정인가?

하라리는 이 선택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AI가 만드는 새로운 연결의 형태가 우리의 사고방식, 감정, 심지어 정체성까지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AI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미래의 인간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AI가 개인 맞춤형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공통의 현실 자체가 사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AI 비서로부터 자신만의 정보를 받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여전히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6. 연결 속에서 찾는 우리의 자리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정보네트워크 앞에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라리는 완전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가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들을 던져준다.

첫째, 나는 어떤 연결들 속에 살고 있는가? 내가 받는 정보들은 어디서 오는가? 내 생각과 판단은 정말 내 것인가, 아니면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것인가? 이런 자기 성찰이 첫 번째 단계다.

둘째, 나는 어떤 연결을 선택할 것인가? 모든 네트워크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있다.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누구와 연결되며, 어떤 이야기를 믿을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셋째, 나는 어떤 연결을 만들어갈 것인가? 우리는 단순히 기존 네트워크의 소비자가 아니다.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다른 방식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연결의 위험성과 필터 버블의 어두운 면

희망은 연결에서 나온다

하라리의 『넥서스』를 읽으며 느끼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우리가 연결의 산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연결을 통해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고,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연결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연결을 선택하는 것이다. 조작이 아닌 소통을, 분열이 아닌 협력을, 거짓이 아닌 진실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유발하라리가 『넥서스』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연결된 존재다. 그리고 바로 그 연결이 우리의 힘이자 책임이다.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지는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내가 보는 뉴스, 내가 사용하는 앱, 내가 만나는 사람들 - 모든 것이 거대한 정보네트워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바로 더 나은 연결을 만들어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